소수의 긴 침묵, 한국 정치판을 떠나는 자들에게
DATE 18-06-15 01:04
글쓴이 : 어드민      

“우리는 참패했고 나라는 통째로 넘어갔다.” 한국 야당 대표가 선거 참패 후 사퇴하면서 남긴 말이다. 모든 책임은 자기에게 있다는 말도 남겼다. 그다지 진심이 느껴지는 말은 아니어도 실감은 난다. 그의 말과 퇴장을 보니 한국은 뭔가 확실히 무너졌고, 또 뭔가 확실히 세워져 이제 더는 어찌할 수 없는 상황이 된 게 분명하다. 보수민주주의는 무너졌고 대중민주주의는 굳게 섰다고 말하는 이도 있다. 

서울시장 선거에서조차 3위로 추락한 또 다른 야당 대표도 부랴부랴 미국행을 택했다. 더 한국에 있어봐야 창피밖에 뭐가 남아 있겠는가. 그가 화려하게 정치계에 입문하면서 자서전에서 한 말이 있다.  

“전쟁과 정치는 적과 싸운다는 점은 같다. 그런데 전쟁은 적을 믿으면 안 되는 것이고, 정치는 아무리 적이라고 해도 상대방의 궁극적인 목적이 나라를 발전시키는 데 있다는 기본적인 믿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적을 믿으면서 싸우는 것, 기본적인 믿음은 가지면서 대결하는 것이 정치다.”

너무나도 순진무구한, 아마추어 같은 생각이었다. 정치가 전쟁과 같다고 봤으면 확실하게 싸우고 그만큼의 각오와 무게로 준비를 해야 했을 터. 한 때 한국 유명 코미디언이 국회의원이 됐다가 곧 그만두면서 “국회 가보니 나보다 ‘웃기는’ 사람이 더 많았다”고 했던 말의 의미를 되새겼어야 하지 않을까.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는 사람들로 가득찬 곳이 정치판이라는 걸 알았다면 더더욱.

어설픈 인기와 욕망으로 뛰어들어봐야 패장의 멍에를 안고 쓸쓸하게 퇴장하는 곳이 정치판이다. 알렉산더 대왕에게 사로잡힌 해적이 있었다. “감히 나와 대적하는 넌 무슨 생각으로 그런 것이냐?” 해적은 대답한다. “대왕이 세상을 정복할 때 했던 생각을 나도 했습니다. 다만 나는 작은 배로 그것을 하려 했기에 해적이라 불리고, 대왕은 강한 해군을 갖고 그걸 하기 때문에 정복자로 불리게 됐을 뿐입니다.”

사실 정치가 코미디 같다는 건 북미정상회담을 봐도 느껴졌다. 트럼프의 쇼에 모두 현혹된 것 같다는 허탈감마저도 들었다. 북한 핵을 막지 못할 것 같은 불길한 예감, 그리고 트럼프의 관심은 실제 한반도 통일이나 평화보다는 자신의 4년 권력자로서의 임기 및 재선을 먼저 생각하고 밑그림을 그린다는 의심을 거둘 수 없다고나 할까. 

트럼프에게는 11월에 중간선거, 2년 뒤에 본인 재선이 걸린 대선이 있다. 11월 중간선거 결과로 본인 탄핵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실제 미국과 북한의 주요 협상 때마다 미국 중간선거나 대선이 임박한 시점들이었다. 1994년 제네바 합의 때도, 2005년 9·19 성명, 2007년 2·13 합의 때도. 그래서 북미간 핵협상을 현장에서 지켜본 전직 외교관이 “미국에 선거가 다가오면 미국 측 협상 대표의 눈이 떨리는 게 보인다”고 했다니, 그 말이 과장은 아닐 듯 하다.

사상 거대 여당을 공고하게 만든 한국 선거 역시 김정은의 덕을 봤다. 이제 그에 대한 대가를 돌려달라는 고지서를 한국 집권자들에게 내밀 것이다. 온 나라를 장악할 정도로 정권을 강화시켜주고 획일화시켰으니, 이제 되갚으라는 요구는 당연한 수순이다. 

대한민국에서 오래 위세를 구가하던 소수 엘리트 민주주의를 무너뜨리고 대중정서에 기반한 군중정치의 확고한 승리를 선물로 줬으니 마땅하다. 오죽하면 노쇠한 한 보수 논객은 “한 시대가 무너지고 있는 건 확실해 보인다. 필자 같은 왕년의 세대는 쉬 가면 그뿐이다. 자신들이 만드는 시대를 잘들 즐기기 바란다”며 마치 손 털고 떠나듯 글을 남겼을까.

라 보에티는 “세상에서 가장 두려운 것은 우리를 은밀하게 노예로 만드는 유혹”이라고 했다. 폭력으로 통치하는 방법이나 눈에 띄는 억압은 그만큼 명백해 대항하게 되지만, 은연중에 당하면서도 모르는 게 바로 눈에 보이지 않는 ‘지배’라는 말이다. 지배자가 드러내놓고 핍박하지만 않는다면 기꺼이 영혼을 바쳐 속아줄 용의도, 각오도 돼있는 대중들이다. 

‘침묵의 나선’ 효과도 그걸 말한다. 이 이론을 제시한 독일 학자는 “사람들은 자신의 의견이 다수 의견에 속하면 자신 있게 목소리를 내고 소수 의견에 속하면 침묵한다”고 했다. 이제 한국의 소수에 속한 자들은 저들처럼 다 도망치며 아주 길게 침묵할 것이다. 그 침묵에 떠밀려가다 시 한편 읊조려보시길.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되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봄길이 되어 끝없이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이준열 뉴스코리아 편집국장/부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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