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하필 내게 붙어 왔을까
김건하의 詩思時事
DATE 18-05-11 04:15
글쓴이 : 김건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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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뜨락을 돌보던 아내가 전혀 예기치 못한 곳에 갓 움튼 사랑초를 보고 감탄한다. 어디서 씨가 날아와 예서 움텄을까? 우주의 최대 기적은 움트는 일이라는데 우린 지금 최대의 기적을 보고 있는 거네요! 아내는 사랑초 새싹 하나에 자못 감동스런 얼굴이다.
따지고 보면 어찌 사랑초 뿐일까. 당신이라는 씨앗 하나가 내게로 날아와 움이 트고 부부라는 꽃을 피우기까지 30여 년.‘부부’라는 인연이야 말로 기적의 다른 이름 아니겠는가. 나는 속으로 그렇게 뇌며 고분고분 웃는 걸로 답을 대신한다. 불가에선 옷자락 한 번 스치는 사이도 억겁의 인연이라는데 하물며 부부사이에서랴. 
멀고 긴 산행길 / 어느덧 해도 저물어 / 이제 그만 돌아와 하루를 턴다
아찔한 벼랑을 지나 / 덤불 속 같은 세월에 할퀸 / 쓰라린 상흔과 기억을 턴다
그런데 가만! 이게 누구지? / 아무리 털어도 떨어지지 않는 / 억센 가시손 하나
나의 남루한 바짓가랑이 / 한 자락 단단히 움켜쥐고 따라온 / 도꼬마리씨 하나
왜 하필 내게 붙어 왔을까? 
멀리 걸어 온 산행길은 곧 인생길, 지난 세월을 돌아보면 ‘아찔한 벼랑을 지나 덤불 속 같은 세월에 할퀸 쓰라린 상흔과 기억’이 있다. 그 시간을 공유하며 남루한 자신의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기꺼이 따라온 도꼬마리 씨같은 아내가 보인다. 왜 하필 내게 붙어 왔을까? 마치 선문답 같은 화두, 그게 바로 인연일 터이다.
내게도 아내와 참으로 인연이었구나 싶은 소중한 기억이 있다. 
그 해 서른 살 노총각의 인사동은 참으로 적적하였다. 애인도 없이 가난한 노총각은 주말이면 인사동을 공기처럼 떠돌았다. 워낙 사람이 구닥다리다 보니 그랬을까. 인사동 특유의 고적하고 묵은 향기가 늘 위안을 주었다. 그날도 습관처럼 미술관을 전전하다 문득 그림 한폭에 시선이 붙들렸다. 흐드러진 갈대를 배경으로 나룻배에 앉아 강물에 눈길을 놓고 있는 한 여자의 그림이었다. 마치 함께 항해할 그 누구를 기다리기라도 하듯 한 분위기가 더욱 마음을 끌어당기는, 수수하면서도 어쩐지 기품 있어 보이는 그림 속의 여자를 나는 홀리듯 오래오래 바라보았다. 그 여자의 맑은 영혼이 말을 거는 것 같았다. 난 그 그림이 꼭 갖고 싶었다. 오래도록 곁에 두고 싶은 마음이 강렬하게 일었던 것이다. 이런 마음은 다 뭘까. 나의 오랜 그림(그리움)이 그 그림 속에 있기라도 하단 말인가. 하지만 주머니 사정은 허락지 않았고 그로인해 퇴근 후면 매일 그 미술관을 되찾곤 했다. 매일매일 그 그림을 아니 어쩌면 매일매일 그녀를 만나러 갔던 것이다. 전시회는 막을 내렸으나 그 그림은 그렇게 내 마음 한 가운데 걸리게 되었다.
무심히 흐르는 세월 속에서 봄볕처럼 눈부시게 아내를 만났다. 아내는 첫 만남에서 그 그림처럼이나 성큼 내게 다가왔다. 그 묘한 이끌림이 나의 인연일 줄은 짐작조차 못했다. 뭔가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듯한 편안함 가운데 어느 날은 동시에 같은 책을 사서 건네기도 하고, 어느 날은 불쑥 동시에 같은 말을 하기도 하고, 어느 날은 음악다방에 같은 곡을 신청하기도 하고, 마치 일란성 쌍둥이처럼 이상도 가치관도 꼭 같아서 우리의 기분 좋은 우연들을 인연으로 이어가기에 충분했다. 꼭 맞는 인생의 퍼즐 한 조각을 그렇게 찾은 기분이었다. 밤마다 그녀를 생각하며 시를 쓰고 편지를 쓰는 동안 혹독했던 서울의 겨울은 한 여자로 인하여 참으로 따뜻해졌다. 우린 그렇게 사랑이 깊어졌고 결혼 약속을 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그녀 집에 인사 드리러 간 날. 그녀 방에 걸려 있던 그림을 보고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 방 그림 속 여자와 오래 전 내 마음에 들어왔던 그림 속 여자가 똑 같았던 것이다. 그림 한 점의 깊은 인연이! 그림 한 점의 대서사가 바야흐로 펼쳐지고 있었다. 경위를 알고보니 아내는 잠시 대학 은사님의 간청으로 남편되시는 화가 분의 그림 모델을 했다는 것이다. 작품이 끝난 후 사례하시겠다는 걸 극구 거절했더니 대신 초상화 한 점을 그려주셨다고. 난 결국 그림 속의 여자, 아내를 얻은 것이다. 소설처럼 드라마처럼 ‘도꼬마리씨’ 인연이 그렇게 내게 찾아왔다. 그림 한점이 도꼬마리씨가 될 줄이야.

내가 어디서 와서 /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 무작정 예까지 따라온 여자 같은
어디에 그만 안녕 떼어놓지 못하고 / 이러구러 함께 온 도꼬마리씨 같은  
아내여, 내친 김에 그냥 / 갈 데까지 가보는 거다
서로가 서로에게 빚이 있다면 / 할부금 갚듯 정주고 사는 거지 뭐
그리고 깨끗하게 늙는 일이다

아내가 정성들여 가꾼 한련화가 지난 비에 훌쩍 자라 너울너울 뜰을 가득 메웠다. 어쩌면 아내는 이 한련화처럼 그저 하늘거리며 은은한 빛을 발할 운명으로 태어났을 지도 모르는데. 어쩌다 내 남루한 옷자락에 붙어 도꼬마리처럼 살아오게 됐을까. 비록 그 곱던 모습이 풍상에 바래지고 머리에는 무서리가 내려앉았지만 아슬아슬 벼랑 길과 덤불 속 같은 세월을 함께 건너왔기에 내겐 참으로 고맙고 어여쁘다. 아내가 한련화 잎을 따다 비타민이라며 입에 넣어준다. 배추 끝동같은 맵싸한 향기가 입안 가득 번진다. 아내는 정작 자신이 내게 비타민인줄 알까. 인연을 거꾸로 읽으면 연인, 어쩌면 한뜻일지도 모를 나의 오랜 연인이여. 우리 인연의 마지막 과제는 깨끗하게 늙는 일이다.
< 도꼬마리씨 하나 > … 임영조
   멀고 긴 산행길
   어느덧 해도 저물어
   이제 그만 돌아와 하루를 턴다
   아찔한 벼랑을 지나
   덤불 속 같은 세월에 할퀸
   쓰라린 상흔과 기억을 턴다
   그런데 가만! 이게 누구지?
   아무리 털어도 떨어지지 않는
   억센 가시손 하나
   나의 남루한 바짓가랑이
   한 자락 단단히 움켜쥐고 따라온
   도꼬마리씨 하나

   왜 하필 내게 붙어 왔을까?
   내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무작정 예까지 따라온 여자 같은
   어디에 그만 안녕 떼어놓지 못하고
   이러구러 함께 온 도꼬마리씨 같은
   아내여, 내친 김에 그냥
   갈 데까지 가보는 거다
   서로가 서로에게 빚이 있다면
   할부금 갚듯 정주고 사는 거지 뭐
   그리고 깨끗하게 늙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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