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다른 길
아주 오래전 디즈니랜드에서 놀이 기구 중 하나를 탄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어둠 속을 달리다가 막다른 길에서 애타하는 것도 잠시 그때마다 길이 열렸다. 마음을 졸이고 졸이다가 순식간에 입구가 나타났다. 이 놀이기구는 놀래는 것을 노린 것 같다. 그런데 진짜 막다른 길을 체험한 적이 있다. 막다른 곳의 벽을 보고 숨이 막혔다. 그리고 죽을 것 같았다. 그것은 나의 기억이지만 교통사고를 당해 사경을 헤매고 있었던 곳이라는 것을 나중에 알았다. 절명의 순간에 폐가 작동되어 살게 되었다. 살면서 이렇게 막다른 길을 만나면 피할 길을 주셔서 능히 감당케해 주신다고 주님은 말씀하신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모든 사람에게 피할 수 없는 막다른 길은 죽음이다. 그리고 이후에 펼쳐질 천국과 지옥은 두려움과 경이의 쌍곡선이다.
만일 순간순간 이 두 곳을 의식하고 산다면 삶이 많이 달라지리란 생각이다. 그곳에서는 심판이 반드시 있다. 무신론자들이야 애써 외면하지만 그렇다고 있는 것이 없어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스데반이 죽음의 위협 속에서도 얼굴이 천사와 같았다고 한다. 죽음을 넘어선 평강이 있었다는 것이 놀랍다. 얼마나 좋은 것이 그의 눈에 보였으면 돌에 맞아 죽으면서도 평화로울 수 있었을까? 이미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심으로 인해 불신자들은 심판을 받았다고 성경에서는 말한다. 그럼에도 하루하루 사는 것은 회개할 수 있는 기회의 은총이다. 그런데 죽음 후에 천국과 지옥을 가지 않아도 세상에 살면서 지옥을 사는 사람들이 있다. 칼로 묵 베듯이 단정 지을 수는 없지만 문제의 연속 속에 참 평강이 없고 기쁨이 없이 죽지 못해 사는 사람들, 혹은 스스로 죽음을 택할 만큼 괴롭고 그 어디에서도 위로받지 못하는 자들이다. 주님의 때가 쥐도 새도 모르게 온다니 참으로 산개가 죽은 사자보다 낫다는 전도서의 말씀이 생각난다.
살아있기에 회개의 소망이 있는 것이다. 250여 년 전 미국의 각성운동의 중심에 계셨던 조나단 에드워드 목사님께서는 목회자를 대상으로 “성난 하나님의 손에 잡힌 죄인들”이란 제목의 설교를 했다. 조나단 목사님이 나이가 들고 힘이 없어 설교문을 떠듬떠듬 읽어가는 데 설교가 끝나기도 전에 목사님들이 강단에 올라와 노 목사의 바지 가랑이를 부여잡고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났다. 언제라도 지옥의 불 못에 떨어질 거듭나지 못한 영혼들은 하루하루 주의 은혜로 생명을 유지하고 있다는 내용이다. 자신이 죽은 후에 어디에서 살게 될지를 늘 질문하며 살아야 한다고 하신다. 그러니 지금 잘 먹고 잘 사는 일에 목을 매고 있는 우리들에게 경종이 될 수밖에 없다.
혹은 부족함이 없이 잘 사는 우리가 뜨뜻미지근하게 신앙생활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미국에서 내 인생의 반이 넘게 사는데도 미국 시민이라는 생각이 잘 안 든다. 항상 한국에 돌아가는 일에 정신이 가 있다. 나만 그런 것일까! 마찬가지로 천국 시민임을 확신하고 산다지만 세상일에 연연해하는 자신의 모습을 보고 당황스럽다.
이 땅에서의 삶이 영원에 비하면 한순간인데 참으로 죽은 행실에 마음과 몸이 가고 회개하지도 않는다. 사실 막다른 길에서 가장 곤혹스러운 것은 회개할 수 없을 때이다. 그러니 회개도 내 맘대로 하는 것이 아니다. 회개의 영이 임해야 한다.
회개는 죄에 대한 빗 청산이다.
주님과 계산이 끝나면 막다른 길이 열린다. 어느 사냥꾼이 사냥을 하다가 사자를 만났다. 엉겁결에 ‘걸음아 날 살려다오’ 하며 줄행랑쳐 도망가다가 웅덩이에 떨어졌다. 나 죽었다 생각하고 내려가다 구사일생으로 늘어져 있는 나무뿌리를 잡고 매달렸다. 휴, 안도의 숨을 쉬며 웅덩이 아래를 보니 살모사가 우글거렸다. 놀라서 위를 보니 뒤따라온 사자가 이빨을 내놓고 으르렁거리고 있었다. 그때 그는 나무뿌리에 대한 고마움을 깊이 느끼고 있었다. 그때 어디서 인지 무엇을 갉아먹는 소리가 났다. “삭 삭 삭” 하고 들려왔다. 소리 나는 쪽을 보던 그는 깜짝 놀랐다.
자신이 매달려 있는 나무뿌리 끝을 생쥐가 갉아먹고 있는 것이 아닌가? 톨스토이는 이것이 현대인의 인생이라고 말했다.
그러니 우리 인생의 살길은 전심으로 생명의 주가 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고 찾는 것이다. 주안에만 기쁨이 있고 감사가 있으며 소망이 있다.
부활하셔서 성도의 삶을 인도하시는 주님께 굴복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