튜닝의 삶
한국에 계신 절친한 목사님께서 책을 내셨다고 보내오셨다. ‘행복시소’ 책 제목이 좋다. 내가 낮추면 상대방이 올라가고 상대가 낮추면 내가 올라가는 시소처럼 그렇게 행복은 자기를 낮추고 맞추고 상대를 높이는 데서 시작된다고 말씀한다.
그렇다. 우리 삶의 전환점은 일생에 몇 번 밖에 오지 않지만 매일의 생활 습관과 반복하는 일상을 튜닝(tuning)하며 사는 일은 수시로 해야 하지 않을까? 마음대로 화려해지고싶고, 마음대로 하고 싶은 일도 바다처럼 쌓여서, 살아도 살아도 자꾸만 잘못 사는 것 같은 죄스러움 때문에 오늘도 내 영혼에 눈물이 마르지 않는데…. 그렇게 눈물을 흘리고 흘려서 마음의 때가 씻어지고, 죄악의 덩어리가 녹을 수 있다면 며칠 밤이고 며칠 낮이고 흘려도 좋으련만…. 보이는 대로 말하고 느낀 대로 판단하는 우리들, 그래서 아무 데나 퍼져 있는 들꽃같이 제멋대로 자란 우리의 모습을 ‘가지치기’라는 아픔을 통해 튜닝해 가시는 주님의 손길이 고맙고 또 감사하다.
많은 사람이 자기가 하는 일들 속에서 행복을 찾지 못해, 자신의 행복을 위해 또 다른 취미와 놀이를 찾아 헤맨다. 지금 하는 일과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이 달라서이다. 그래서 마지못해서 죽지 못해 하는 일이라서 하루의 삶이 그렇게 버겁고 지겹기만 하다. 이는 자기를 아는 지식이 없어서 그렇다. 자기를 사랑하는 기술이 없어서이다. 그래서 일찍이 호세아 선지자는 ‘내 백성이 지식이 없어서 망한다’고 했다. 그렇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고, 자신을 아는 지식도 없어서 신나는 삶을 살지도 또 성공적인 삶을 살지도 못하는 게 아닐까?
우리는 오늘 삶의 튜닝이 필요하다. 그래서 내가 하는 일을 사랑하고 오늘 하루 동안에 만나는 사람들을 가장 귀중히 여기며 사는 그야말로 일과 놀이와 취미가 따로가 아닌 하나로 어우러진 삶이 될 때 그 삶은 진짜 ‘신명’나는 삶이 되리라.
그렇다, 우리의 행복은 내가 가장 사랑하고 또 가장 가까운 사람들과 잘 지내는 것이리라. 그것이 있어야 아무리 힘겹고 고된 일들로 마구 흔들려도 또 다시 우뚝 서게 나를 지탱해 주는 힘이 되지 않을까?
사람들은 아주 작은 일에 상처를 받는다. 큰 문제는 크기 때문에 이해하고 넘어간다. 그러나 작은 문제는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섭섭한 마음이 생기게 된다. 또 반대로 아주 작은 일에 사람들은 마음이 선해지며 가슴이 뭉클해한다. 머리가 아프다고 하는 성도의 주머니에 넣어준 타이레놀 한 알, 아이의 도시락 속에 넣어준 ‘사랑한다’는 쪽지 한 마디, 남편 카톡에 보내준 ‘당신 때문에 산다’는 한 문장 때문에 우리는 오늘도 지겹도록 매일 같이 만나는 사람들과도 잘 지내며, 뭉클뭉클 행복을 느끼며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해가 뉘엿뉘엿 지는 황혼이 멋있다. 그래서 이곳 텍사스에는 산도 강도 없다고 투덜대던 입에서 이젠 저 광활한 대지를 바라보며 감동이 터지고 감사가 나온다. 울타리도 높은 산도 없이 펼쳐지는 끝없는 들판처럼 우리 마음을 낮추고 낮추면 모든 사람에게 열리고 쉼을 주는 평온한 삶이 찾아오리라는…. 삶이 튜닝된 것이다.
어제 시력이 너무 약해서 앞이 잘 보이지 않으시는 할머님이 교회 문에 들어서시며 푸념처럼 말씀하신다. 눈이 잘 안 보여서 속상하시다고…. 그러시더니 얼른 정정해서 말씀하신다. 그래도 이렇게 두 발로 걸어서 교회에 오실 수 있어서 너무 감사하다고…. 바로 삶의 튜닝을 하신 거다.
그렇다. 그렇게 마음의 고향과도 같은 넓고 따뜻한 마음이 되어 묵묵히 바라만 보아도 진실함과 그 향기가 느껴지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탐스러운 과일이 달린 나무 밑에는 어김없이 사람들이 모여들듯이 ‘내 작은 기쁨과 은은한 향기로 누구나 가까이하고 싶은 잘 튜닝된 삶을 살아야지’ 오늘도 또 다시 다짐해 본다.
장사라 사모
빛과소금의교회
‘영의 행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