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올린 연주로 주의 음성 들려주는 사역자”
한때 정 트리오를 조직해 연주 활동을 하고 KBS 관현악단 부악장 등을 거쳐 각종 주요 정부행사와 경제계의 크고 작은 행사에 초대받으면서 세속적인 만족감에 젖었던 정명자 권사가 오로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바이올린을 켠지 어언 20여 년이 되어 감회가 새롭다.
정 권사는 엄마 뱃속에 있었던 태아 때 하나님을 만났다. 지금으로부터 70년전, 아직 한국에서는 기독교가 신기원마냥 낯설기만 했던 시절, 그녀가 태어난 충청남도 공주군 계룡면은 신원사, 갑사, 동안사 등과 같은 셀 수 없는 많은 절과 작두에서 춤을 추는 무당들을 비롯해 민간 사상들이 크게 자리잡고 있던 때였다.
정 권사의 외조부는 5대 독자로서 아들 셋과 딸 넷을 뒀는데 아들 둘이 죽고 막내 아들이 스무살 즈음 병색이 짙어갔다. 아들을 살리기 위해 무당에게 굿을 했으나 안타깝게도 막내 아들마저도 저 세상으로 보냈다. 그러다 둘째 딸마저 시름시름 앓다가 자리에 누웠는데 그 당시 윌리엄 선교사 부부가 집에 찾아와 “예수를 믿어야 구원받고 천국에 간다”며 복음을 전했다.
예수를 믿어 가족에게 일어난 기적
외조부모는 딸을 살려주기만 한다면 예수를 믿겠다고 약속했고 선교사는 매일 눈물의 기도를 올렸다. 그런데 기적 같은 일이 벌어졌다. 계속 탈진 상태로 물 한 모금 입에 대지 못했던 딸이 며칠 후에 눈을 뜨고 조금이나마 물을 넘기기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미음과 죽까지 입에 댈 수 있게 됐다. 선교사는 계속해서 기도를 했고 얼마 후에는 놀랍도록 깨끗하게 나았다.
죽을 날만 받아놓고 관까지 준비해 놨던 딸인데 기도 응답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던 것이다. 이런 집안 분위기로 인해 당시 막내 딸이었던 정 권사의 모친은 자연스럽게 하나님을 영접했고 정 권사는 찬송가가 태교 음악이었을 만큼 교회 생활이 처음부터 몸에 배었던 것.
자신이 사는 시골 마을이 세상의 전부인 줄 알았던 정 권사는 당시 공무원이었던 부친이 인천으로 발령이 나서 가족들이 모두 이사를 했다.
50년대에는 지금처럼 악기를 다룬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한 때 음악가를 꿈꿨던 부친은 어린 정 권사에게 바이올린을 쥐어줬고 8살때부터 정 권사는 활을 잡았다.
하나님의 낮고 잔잔한 음성을 듣다
정 권사의 귓가에는 아직도 할머니의 기도가 들리는 듯 하다.
“하나님 아버지시여. 우리 명자에게 건강을 주시고 온 나라를 왔다리 갔다리하며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일을 하게 해 주소서.”
그렇게 할머니가 기도를 마치고 나면 “나는 믿어요. 아멘이오. 아멘이오”라고 동의하며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던 어머니가 함께 계셨다.
당시에는 한국에서 연주를 하는 것만도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한국은 물론, 전 미주를 순회하며 간증과 연주를 하게 된 것을 보면 두 분의 간절한 기도가 오늘의 정 권사를 있게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 권사는 일찍부터 하나님 말씀에 순종해 왔으나 대학을 졸업하고 KBS방송국에서 활동하는 등 열심히 돈을 벌었던 때도 있었다. 그러나 세상의 돈벌이를 조금만 더 하겠다는 생각을 계속 하고 있는 차에 어느 새벽 녁, 화장실에서 갑자기 둔부를 맞은 것처럼 쓰러지는 일이 벌어졌다.
강남 세브란스 병원에 실려간 지 며칠 후, 천장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서 눈을 떠보니 보름달 만하게 타고 있는 불덩이에 평소 그림을 통해 봐왔던 예수님의 상반신이 눈 앞에 나타났다.
낮은 저음의 잔잔한 육성의 음성이 정 권사의 가슴을 뜨겁게 달궜다.
“사랑하는 딸아, 내가 너에게 진실로 진실로 이르노니. 이제부터 병든 자들과 귀신 들어간 자들을 낫게 하여라.”
“하나님, 제가 어찌 그런 일을 하오리까. 제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바이올린 연주 뿐입니다.”
“기도하여라. 네가 가는 곳은 어디든지 너와 함께 하리라. 나에게 속한 바이올린을 든 사도가 되라.”
거역할 수 없이 힘 있고 그러나 낮으면서도 잔잔한 음성이 정 권사의 귓가를 맴돌았다.
남들보다 돈도 많이 벌고 일을 많이 하는 만큼 돈도 벌었지만 돈이 생기니 귀한 지도 모르게 되는 것이 사람이었다.
항상 무언가 채워지지 않는 허전함과 목마름이 그녀를 힘들게 하기도 했다. 그러던 차에 ‘새롭게 하소서’라는 간증 프로그램에 출연하면서 각 교회에서 정 권사를 찾는 연락이 오기 시작했다. 이를 계기로 찬송과 간증을 겸하고 워싱턴을 포함 32개주를 돌며 순회 공연까지 하게 됐다.
이명박 대통령과의 기억
그녀에게는 특별한 기억이 하나 있다.
이명박 대통령이 서울 시장이 되기도 전인 10여년 전, 김만철, 이명박 장로 등 네 명과 함께 4개월간에 걸친 집회를 하게 됐다.
“제가 본 이명박 장로님은 굉장히 소박했고 너무나 강직한 모습이었어요. 그때 제 스스로 생각하기를 현재와 같은 믿음만 변치 않으면 서민들의 애환도 너무 잘 알고 계시기에 좋은 대통령, 하나님이 원하시는 아름다운 대한민국을 만들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장로님은 부지런해서 새벽 5시면 일어나서 산보를 했는데 저희가 아침을 먹든 말든 꼭 저희 방문 앞에 호텔에서 제공하는 아침을 놓고 갔어요. 거기서 느껴지는 장로님의 따뜻한 정 때문에 차갑게 식은 커피가 맛있기만 하더라구요.”
국회의원 출신인데도 참 따뜻하고 세심하게 배려하는 모습에 하나님의 사랑을 갖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단다. 그 이후로 서울 시장을 거쳐 이제 장로님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대통령 자리에까지 올랐으니 그 인연이 참 소중하고 특별하기만 하다.
이 외에도 정 트리오에서 활동했던 그녀는 박정희 전 대통령을 위해 ‘번지없는 주막’, 전두환 전 대통령이 좋아하는 ‘죽장에 삿갓쓰고 방랑 삼천리’, 노태우 대통령의 애창곡 ‘베사메 무쵸’에 이르기까지 대통령 내외와 각 장관급 인사들 앞에서 바이올린 연주를 선사하기도 했다.
기도를 해야 하는데 가요를 연주해야 한다는 생각에 괴롭기만 했던 정 권사. 그래서 택한 방법은 밤 10시만 되면 ‘이 시간 주님께 기도합니다’, ‘예수 이름으로’ 등 찬송가 연주를 하기 시작했다. 급기야 예수 트리오라는 별명을 얻었을 뿐만 아니라 전직 모 건설부 장관은 이 연주들이 밤 10시를 알리는 시그널 뮤직인줄 알았다고 하니 그녀의 하나님에 대한 신실함은 끝이 없었다.
정 권사는 방송국 단원들로부터 “예수 동생 예자 오신다 길을 비켜 드려라”라는 농을 들을 만큼 주일은 무조건 교회 일에 헌신을 다하기도 했다. 정 권사가 하나님을 간구하는 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다.
정 권사는 미 자립교회를 돕고 신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하는 등 많은 일을 하고 있으며 또한 전세계적인 선교단을 조직을 목표로 팀원을 모아 선교음악팀을 만들고 학생들의 양성에도 힘을 쏟고 있다.
글 · 이정윤 기자 uni@wnewskore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