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루투스 너마저, 여기가 전쟁터면 거긴 지옥일텐데
북한의 대대적 숙청 기사가 났다. 북한 숙청 학살 기사는 한두번 나온 게 아니지만, 이번 숙청은 하노이 미북 정상회담 결렬에 따른 실무 협상 담당자들에 대한 것이어서 주목을 끈다. 대미 협상을 총괄했던 이들이 처형 당하거나 강제 노역 및 사상교육으로 끌려갔다는 것이다. 통역 담당자도 정치범 수용소로 보내졌고 김정은 동생 김여정도 근신 중이다.
처형의 이유는 “미제에 포섭돼 수령을 배신했다”는 미제 스파이 혐의가 적용됐다고 한다. 통역 실수에 대해서도 “최고 존엄의 권위를 훼손했다”고 엄중 책임을 물었다. 노동신문은 “앞에서는 수령을 받드는 척하고 뒤에 돌아앉아서는 딴 꿈을 꾸는 반당적, 반혁명적 행위를 했다”고 이들을 몰아세웠다. 이렇게 숙청과 처형을 암시하는 표현이 마구 쏟아져 나온 것은 2013년 장성택 처형 이후 처음이라는 점 때문에 그 공포 분위기가 더 심하게 느껴진다.
외교 일을 하다보면 실수도, 실패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변수도 많고, 술수와 지략을 겸비해도 항상 성공할 수 없는 게 외교일 것이다. 북한의 외교 담당자들이 노동신문 말처럼 배신하고 변절돼 그런 것도 아닐텐데, 그 모든 결과에 대한 책임을 강제로 떠맡고서 처형되는 걸 보니 새삼 더 공포스럽다.
북한에 비하면 남한의 외교 담당자들은 ‘천국’에 살고 있는 셈이다. 숱한 실수와 결례, 그리고 무능과 졸속을 최근 다양하게 보여주고 있지만 그에 대한 책임을 지는 이도, 또 심하게 문책 당하는 이도 없다. 현 정부는 오랜 기간 경험과 능력이 검증된 외교관들을 적폐로 몰아 내치고 코드 인사들을 꽂아 넣었다. 어차피 정권유지가 최우선인 현 정부에서 외교적 실수나 망신은 굳이 신경쓸 일이 아닐 수 있다. 내 사람을 챙기고 자리 보전시키는 게 중요하지 밖에 나가 뭔 헛발질을 하는지 따질 이유도 없어 보인다.
이런 자세로 일하는 이들이 또 자신들은 언제나 정의롭다고 여긴다. 경제, 외교, 국가 안보가 무능으로 거덜이 나도 이들은 자신들의 오류를 절대 인정하거나 사과하지 않는다. 자신들만이 정의이고 진실의 가치를 갖고 있다고 여겨서 그럴 것이다.
“모히또에 가서 몰디브 한 잔 해야지”라는 남자 주인공의 코미디 대사로 유명한 영화 ‘내부자들’이 요즘 더 생각난다. 비리의 배후자 중 하나인 신문사 논설주간의 대사도 자꾸 떠오른다. “대중들은 개, 돼지입니다. 적당히 짖어대다 알아서 조용해질 겁니다.” 정치 깡패역 주인공이 “정의? 대한민국에 그런 달달한 것이 남아있긴 한가”라고 내뱉던 대사와 함께다.
최근 한국 국가정보원장과 민주당 선거책임자의 만찬 자리에 모 방송국 국장급 기자가 함께 한 일이 밝혀져 논란이 일고 있다. ‘내부자들’의 어느 한 장면에서 본 그 모습이다. 물론 사적인 만남으로 다른 이야기는 없었다고 해명하지만, 방송국 노조조차 “정치적으로 민감한 대화가 오갈 수 있는 자리에 기자를 불렀다는 건, 그를 기자가 아닌 동업자 내지 내부자로 여긴 것이어서 가슴 아프다”고 비난할 정도다.
사실 주요 언론사 기자나 국장이라면 권력자나 정치가들이 무슨 기사를 써낼까봐 두려워해야 하는 존재다. 자기들 입맛에 맞는 ‘용비어천가’를 써주는 ‘기레기’로 취급하지 않는 한 그렇다. 한국언론학회 창립 60주년 행사에서 웨인 완타 플로리다대 언론학 교수가 지적한 바가 그거다. “권력자가 진실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의미있는 진실을 보도하는 게 언론의 역할이다.” 그는 신문과 독자에게 뉴스의 가치 판단 기준을 바꾸라며 “미디어는 속보·단독 경쟁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독자들도 가짜뉴스를 보면 문제점을 지적하라”고 주문한다.
사이비 언론인이나 위장 언론사가 비단 한국에만 있겠는가. 돈이 목적인 언론사, 돈과 힘깨나 있어보이는 지역 인사에게 빌붙어 이득이나 노리는 ‘찬양’ 기사 생산기계인 언론인들이 이곳에는 왜 없겠는가.
옛날 카이사르의 정부(情婦)였던 세르빌리아가 아들 브루투스에게 했던 조언, “이기는 편에 서거라”를 따르느라 유리한 자 따라 이리 붙고 저리 붙어 다니다가 결국은 배신으로 ‘브루투스 너마저도’라는 비극의 대사 주인공이 된 것처럼 여기도 이리 저리 휘젓고 다니며 언론사 밥 얻어먹는 이들은 또 없을까.
한국 아나운서들이 프리랜서로 방송국을 줄줄이 나가자, 따라서 나가려는 후배들에게 해준 조언이 있었다. “여기가 전쟁터면 거긴 지옥이야.” 그래서 묻는다. 전쟁터에서 홀로 살아남으려 배신하며 달려가 그곳에 붙은 자들이여, 어때, 거기 지옥 맛은 달달한가.
<이준열 뉴스코리아 편집국장 | 부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