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답하라 386, 조스트라다무스 괴물에서 나와라
지금은 50대에 들어서 ‘586 세대’로 불리는 이들은 원래 존중받던 이름인 ‘386 세대’였다. 80년대 학생운동을 통해 민주화운동을 경험한, 개념과 진리에 불타는 이들이었다. 독재 탄압에 항거하느라 억압받는 이의 대변자로 빛나는 세대였다. 최류탄의 눈물과 김민기의 아침이슬을 캠퍼스에서 전경들과 함께 맛봤던, 비감한 낭만의 시기였다. 지금도 캠퍼스 마당에 비추던 햇볕의 따사로움과 눈코를 시리게 하던 최류탄 냄새가 동시에 떠오르는 건 나만이 아닌 모든 386의 강렬한 기억이리라.
내가 겪었던 386의 그 기억들이 요즘 무참히 무너지고 또 후회스런 일이 돼가고 있다. 586으로 이제 한국 주류에 입성해 정치적으로 요직을 거머잡은 동지들의 현재 모습은 386의 순수하면서도 진실했던 그 때 그 모습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 명의 피의자 때문에 5천만이 고생’이라는 표현을 다시 떠오르게 만든, 386 동지 법무장관의 ‘괴물’ 변신이 그것이다.
사실 이 표현 자체가 그의 어록이었다. 2016년 박 대통령을 겨냥해서 한 방 의연하게 날렸던 말이었다. 또 당시 한 여성장관에게 “무슨 낯으로 장관직을 유지하면서 수사를 받는 것인가”라고도 맹비난했다. 그 때는 환호를 받기에 충분한 멋진 표현의 말들이었는데, 똑같은 힐책을 자신이 현재 받고 있다. 오죽하면 ‘조스트라다무스’라는 말까지 나올까.
586이 되면서 살찌고 비루해진 이념과 인격, 그리고 비대해진 이기적 삶의 족적이 동지들을 부끄럽게 한다. 더 이상 잘 빠진 고등어처럼 싱싱하고 등 푸르게 살아 항해하던 386의 모습은 아닌 것이다.
참여연대의 집행위원장이라는 이가 받는 핍박에서도 586 모순을 본다. 참여연대야말로 타락한 정권을 감시 비판하며 시민을 대변한다는 인물들로 구성된 의로운 단체 아니었던가. 그러나 지금 한국 정권의 요직을 참여연대 출신들이 대거 맡으면서 이들 또한 ‘권력’과 ‘돈’의 비릿한 맛을 보고 말았다. 어용 관변단체의 본색이 드러나 본연의 의무를 망각 중이다.
그래도 그 중 양심이 살이있던 이기 있었기에 그들이 존경했던 인물이 5천만 대한민국을 둘로 갈라놓고 온통 난리통으로 몰아넣는 걸 보고 쓴소리를 했다. 분명 범죄적 하자가 있으니 법무장관에서 물러나라고. 그리고 그를 감싸는 참여연대에게 더 이상 부끄럽게 하지 말고 정신 차리라는 일침을 날렸다. 참여연대는 그를 징계에 회부하며 억압했다. 솔직히 상장 위조, 가짜 인턴, 논문 제1저자, 위장 이혼. 사기 소송, 펀드 의혹 등은 이전에 참여연대가 가장 강하게 규탄해온 부조리다. 그런데 지금 어디에 규탄의 총부리를 잘못 겨냥하고 있는 것일까.
친정집과도 같은 참여연대를 향해 위선자들이라고 부르며 “구역질 난다. 입만 열면 개혁, 개혁 하는데, 촛불혁명 정부에서 권력 주변 맴돈 것 말고 뭐 한 게 있느냐”는 자성의 목소리를 내며 홀로 싸우는 이 사람의 모습에서 뒤쳐진 386의 그림자를 본다.
정치가 뭐냐고 자공이 공자에게 물었다. 먹을 것을 충족시키고, 군사를 충분히 갖추며 백성이 믿도록 하는 것이라고 공자가 답했다. 자공이 이 중에서 부득히 버려야 한다면 뭐냐고 하자 공자는 군사, 그리고 먹을 것이라고 답한다. 백성이 믿지 않는다면 정치는 설 수 없게 된다는 말이었다. 백성을 통치하려면 먼저 통치자가 줘야 한다. 그것이 소통이든 신뢰든, 먼저 주는데 능한 이가 참된 정치가요 지도자다.
법은 무엇일까. “법이란 하늘의 이치를 바탕으로 인정을 따르게 하는 것이다”는 말이 있다. 마땅히 공평하고 정대한 마음으로 합당하게 다뤄야 한다는 말이다. 사적인 의도를 가지고 만들고 사용하는 법은 반드시 공평함을 해친다. 그래서 “법은 하늘이 내리는 벌이다. 법을 가지고 장난치면 하늘을 가지고 노는 것이다”고 했다. ‘조로남불’이나 ‘조스트라다무스’처럼 자기 멋대로 사용해서는 하늘의 징벌을 받는다는 이 말이 지금 꼭 필요한 어록 아니겠는가.
그럼 역사는 뭐라고 하는가. 카의 고전적 명제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말을 되새긴다. 과거 역사적 사실의 중요성을 인식한 역사가가 이를 현재 역사에 맞게 던져주는 화두, 그게 역사의 목소리다. 니체의 말처럼 “역사가는 생의 문제를 고뇌하기 위해 역사를 이야기해야 하며, 생을 살아가는 지도를 구하기 위해 역사를 연구하고 말해야 한다.”
무너진 586의 흉측한 민낯을 보고 놀란 옛 386에게 역사는 절규한다. 돌아오라 386이여, 응답하라 386이여. 다시 빛나라, 자랑스럽던 이침이슬들이여.
<이준열 뉴스코리아 편집국장 | 부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