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결실
토마토 화분이 내게로 온 지 50일째다. 지인이 잘 길러보라며 이 위험한 시기에 집으로 배달까지 해 주었다. 식물 기르는 재주가 없는 건지, 터가 나쁜 건지, 정성이 부족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집에 식물을 들여놓으면 오래가지 못하고 시들어 버렸다. 선물 받은 호접란, 다육식물, 키우기 쉽다는 행운목까지 모두 그러했다. 그래서인지 화분을 받은 기쁨보다 걱정이 앞섰다.
산 마르자노(San Marzano)라는 이름을 가진 토마토 묘목의 1 화방(花房, 꽃방) 열매가 열린 가지에는 길쭉한 모양의 초록색 열매가 올망졸망 달려 있고, 2 화방엔 앙증맞은 노란 꽃이 피어 있었다. 토마토 화분은 해가 내리쬐는 곳에 두되, 물을 많이 필요로 하니 하루에 두 번 충분히 주라고 했다. 곁순도 따 주어야 잘 자라는데, 맨 꼭대기 순은 기다렸다가 곁순이 확실할 때 따 줘야 한다며 엄지와 검지로 곁순 따는 모습을 사진 찍어 카톡으로 보내주셨다. 그날부터 앞뜰에 나가는 게 일상 중 하나가 되었다. 양동이에 물을 받아 화분에 주고, 곁순은 없는지 살피고, 잎이 무성해지면 화초 가위로 잘라주며 자라는 걸 관찰했다. 2 화방 꽃 진자리에 작은 토마토가 얼굴을 내밀었다. 초록초록한 것이 얼마나 신통하고 예쁘던지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어느 날 보니 키도 잘 크고 열매도 잘 맺는 데 토마토 밑이 검게 썩고 있었다. 정 주고 기른 걸 몇 개를 따 버리고 나니 속이 상했다. 알고 보니 우리 것만 그런 게 아니라 지인의 토마토도 같은 병을 앓고 있었다. 칼슘 부족으로 인해 생긴 ‘배꼽썩음병’이니 ‘vigoro’라는 영양제를 사다 흙을 파고 넣어 주면 괜찮을 거라고 했다. 마침 화분에 흙도 모자란 것 같아 영양제와 흙을 사다 채워주었다. 식물도 사람처럼 영양 상태가 과하거나 부족하면 병을 앓는다는 걸 처음 알았다. 토마토가 걱정되어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 때마다 CCTV가 동영상을 찍어 남편에게 보고를 했다. 토마토 싫어하는 남편은 날도 더운데 사 먹으면 되지 뭐하러 고생을 사서 하냐고 흙, 영양제, 호수, 걸개, 벤치, 철사, 지지대 등을 사느라 그 돈이 더 든다며 구시렁거렸다. 직접 기르지 않았으니 살리려는 간절한 마음을 알 리가 없다. 물을 주며 토마토에게 많이 먹고 얼른 나으라고 말을 건넸다. 3 화방에 꽃이 떨어지자 새 열매가 열렸다. 더는 썩지 않았다. 얼마나 다행인지, 잘 이겨내서 장하다고 칭찬해 주었다. 미치지도 않았는데 요즘 내가 토마토에게 말을 한다고 했더니 엘에이에 사는 조카가 한마디 거들었다. 고모가 토마토에게 말을 거는 건 괜찮은데, 토마토가 고모에게 말을 걸면 곧바로 병원에 가라고.
토마토에게 말을 하다 보니 ‘사랑의 불시착’이란 드라마가 생각난다. 패러글라이딩을 하다 돌풍에 휩쓸려 북한에 불시착한 윤세리가 북한군 장교 리정혁을 만나 그의 도움으로 무사히 남한으로 돌아가게 되고 현실을 넘어 제3국에서 사랑을 이룬다는 내용이다. 극 중 세리가 정혁의 집 마당에 방울토마토를 심어 놓고 스페셜 땡스 상이니 잘 키워보라고 했다. 자기는 토마토를 좋아하지도 않고 식물 재배에 관심 없다며 난색하자 양파도 예쁜 말을 들려주면 잘 크고, 나쁜 말을 들려주면 죽는다며 애완풀이라 생각하고 물 잘 주고 하루에 열 개씩 예쁜 말 들려주라고 했다. “햇빛, 진달래, 이슬, 양털 구름, 삼색 고양이, 솔개, 아, 솔개는 아닌가? 솔개는 취소, 장미, 산들바람, 첫눈, 피아노.” 마당에 쪼그려 앉아 토마토에게 예쁜 말 열 개를 들려주던 리정혁이 너무나 짠하고 사랑스러웠다. 긍정적인 말을 듣고 자란 토마토는 예쁘게 잘 커 주었다. 방울토마토의 꽃말은 사랑의 결실이다. 꽃말처럼 두 사람의 사랑도 그렇게 결실을 보게 되었다.
좋은 말을 하며 길러서인지 우리 집 토마토는 7 화방에 꽃을 피웠다. 딸아이가 묶어 준 지지대에 몸을 기대 키를 키우고 가지엔 길고 짧은 토마토를 20여 개 품고 있다. 40일이 넘도록 왜 안 익는지 모르겠다고 안달을 떨었더니 친구가 부끄럽지 않아서 안 빨개지는 거라고 농담을 했다.
지난주에 마침내 토마토의 얼굴이 빨개지기 시작했다. 연애하는 것도 아닌데 괜스레 심장이 두근거렸다. 조석으로 속삭였던 내 말을 접수한 모양이다. 7월 18일, 마침내 첫 수확을 했다. 아까워서 한참 바라보다 먹었는데 싱싱하고 맛있었다. 요즘은 식구들이 돌아가며 물도 주고 예쁘게 익어가는 토마토를 보며 즐거워한다. 토마토를 선물한 분도 흐뭇하실 것 같다. 토마토 화분이 내게 안겨준 건 인내와 행복이었다. 이젠 식물에 기르기에 대한 징크스를 버릴 수 있을 것 같다. 어서 날이 밝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