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성경은 동성애가 죄라고 말한다

지난번 칼럼에서는 성경이 동성애를 금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구약 성경을 어떻게 해석하는지 살펴보았다. 오늘은 동성애 옹호자들이 신약성경의 동성애에 관한 구절을 어떻게 해석하는지 보고 그 문제점을 지적해 보고자 한다.
사역의 자리
구약과 마찬가지로 신약성경에서도 동성애는 명백하게 죄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동성애 옹호자들은 몇 가지의 이유를 들어 신약성경이 동성애를 죄라고 말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첫 번째 근거는 예수님이 동성애를 죄라고 언급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신약성경에서 동성애를 죄로 언급하는 부분은 고린도전서, 로마서 그리고 디모데전서 세 부분이다.
모두 바울서신이다. 동성애 옹호자들은 신약성경에 바울 서신 세 부분 말고 동성애에 대한 언급이 없고 특히 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 동성애에 대해 직접 언급하지 않았기 때문에 동성애는 죄가 아니라는 주장을 한다.
하지만 예수님이 특정한 죄를 직접 언급하지 않았다고 하여 모든 것을 인정하셨다고 보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주장이다. 예수님은 근친상간이나 수간 소아성애자 일부다처 등에 관해서도 언급하지 않았다.
오늘날 심각한 문제로 간주되는 마약, 도박, 강간, 낙태, 알코올 중독 등도 복음서에서 직접 언급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모든 그리스도인은 이것들이 심각한 죄임을 알고 있다.
예수님께서 복음서에서 동성애 문제를 직접 거론하지 않으신 것은 당시 유대 사회에서 동성애는 모두가 심각한 죄로 생각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구태여 언급할 필요가 없으셨던 것이다. 반면에, 바울이 그의 서신을 기록할 당시 로마 지역에는 동성애가 상당히 널리 퍼져있었다.
삶에서의 적용
- 믿음은 삶의 자리에서 검증된다.
- 어려운 때에 붙잡는 말씀과 이웃의 기도가 실제적인 힘이 된다.
- 그 경험은 다시 다른 사람을 세우는 통로가 된다.
당시의 문헌들을 살펴보면, 로마의 상류층들은 그리스에서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졌던 동성애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였고 그것은 교회의 성도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바울은 동성애에 대해 언급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고, 고린도에 보내는 편지와 디모데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매우 구체적으로 그 사실을 언급하고 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6장 9절에서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지 못하는 사람들을 나열했다. 거기에 탐색과 남색 하는 자들이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헬라 원어로는 말라코스(Malakos 탐색)라는 단어와 아르세노코이테스 (Arsenokoites:남색)라는 단어가 사용되었다.
이에 대해 동성애 옹호자들은 말라코스가 동성 관계에서 여성의 역할을 하는 소년을 말한다고 주장한다. 어린아이를 착취하는 사람만을 일컫는다 것이다.
아르세노코이테스(Arsenokoites:남색)에 대해서는 남성의 아르센(Aresen)과 코이테스(Koites) 가 합쳐져서 억압적이고 착취적인 성행위라고 주장한다. 이성애자들이 이성애 자체는 문제가 안되지만 강간이나 간음, 매춘이 죄로 취급되는 원리와 같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말장난에 불과하다. 실제로 그리스어 사전을 찾아보면, 탐색으로 번역된 말라코스(Malakos)는 남성 동성 관계에서 여성적인 역할을 하는 사람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그 외에 많은 그리스어 문서에서도 말라코스(Malakos)는 동성애에서 여성의 역할을 하는 사람으로 사용 되었다. 아르세노코이테스(Arsenokoites)라는 뜻도 사전을 살펴보면 신전에서 몸을 파는 성매매 남창이나 혹은 억압적인 성행위가 아닌 일반적인 동성애를 지칭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음 세대
세 번째는 동성애를 죄의 결과로 인한 일반적인 현상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로마서 1장 26,27절에는 남성 동성애 뿐 아니라 여성 동성애까지 다루고 있다.
“그들을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 두셨으니 곧 그들의 여자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그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자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 일듯 하매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그들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들 자신이 받았느니라”(로마서 1:26-27) 동성애 옹호자들은 이 구절을 동성애는 원인이 아니라 결과라고 해석한다. 쉽게 말해 하나님의 심판의 결과로 동성애가 주어졌지 동성애 때문에 심판이 주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들이 이렇게 해석하는 이유는 동성애의 원인을 하나님께로 돌리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선천적이라는 것이다.
이들은 순리와 역리라는 단어도 특이하게 해석한다. 하나님께서 동성애자들은 동성애자로 창조하셨기 때문에 동성애자들에게 있어서의 순리란 동성 관계이며 역리 란 이성관계이다.
이성애자들에게는 이성애가 순리이고 동성애가 역리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들의 주장은 큰 모순이 있다.
| 영역 | 내용 | 함께할 일 |
|---|---|---|
| 사역의 자리 | 지역 교회는 새로 정착한 가정에게 언어와 생활 정보를 함께 나 | 지역 교회는 새로 정착한 가정에게 언어와 생활 |
| 삶에서의 적용 | 감사와 회개의 태도는 관계를 회복시킨다. | 감사와 회개의 태도는 관계를 회복시킨다. 서로를 |
| 다음 세대 | 다음 세대를 세우는 일은 오랜 시간이 걸린다. | 다음 세대를 세우는 일은 오랜 시간이 걸린다. |
로마서 1장은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죄인들이 만물을 통해 계시된 하나님을 알려고도 하지 않고 영화롭게도 안 하니 하나님은 그들을 죄의 욕망대로 버려두어 그들이 죄의 극단인 동성애까지 행하고 여러 가지 악에 깊이 빠지게 되었다는 내용이다.
함께 세우는 일
언듯 생각해 보면 동성애는 죄의 결과라는 해석은 맞다. 그러나 세상에 모든 죄는 다 인간의 타락의 결과이다.
타락의 결과 인간은 우상을 숭배하고 간음을 행한다. 그렇다고 하여 그 책임을 하나님께 돌릴 수는 없다.
그것은 우리의 악함의 결과이기도 하다. 동성애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죄보다 특별하고 악한 죄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동성애는 분명히 죄이다. 그것은 간음이 죄이고 살인이 죄인 이치와 비슷하다.
인간은 타락의 결과 미워하고 시기하고 살인하고 간음한다. 그러나 그 책임을 하나님께 돌릴 수는 없다.
그러므로 동성애가 선천적이고 하나님의 심판의 결과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고 그것을 죄로 볼 수 없다는 주장은 틀리다. 결론적으로 신 구약 성경은 동성애를 명백히 죄라고 선언한다.
돌봄과 동행
동성애 옹호자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성경이 동성애를 금하지 않고 있다고 증명하려 애를 쓰지만 그것은 이치에 맞지 않다. 오히려 성경을 사사로이 풀 뿐이다.
필자는 동성애를 간음죄나 살인죄보다 훨씬 위험하고 심각한 죄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동성애가 죄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에는 동의할 수 없다.
동성애는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를 최초의 사람으로 창조하신 창조 원리에 맞지 않다. 설령 선천적으로 동성애에 대한 유혹이 있다 할지라도 그것은 죄로 인해 타락한 인간의 죄성 가운데 한 가지로 보아야 한다.
동성애는 타락한 인간에게 나타난 죄의 욕망이다. 살인에 대한 욕망, 간음에 대한 욕망 또한 타락한 인간에게 나타나는 선천적인 죄의 욕망이다.
교회의 사역은 예배를 비롯해 교육과 봉사, 돌봄 등 여러 영역으로 이어진다. 각 사역은 담당자와 일정이 정해져 있으므로 안내를 확인하는 것이 좋다. 처음 참여하는 사람에게는 안내와 동행이 특히 필요하다.
믿음은 삶의 자리에서 검증된다. 어려운 때에 붙잡는 말씀과 이웃의 기도가 실제적인 힘이 된다. 그 경험은 다시 다른 사람을 세우는 통로가 된다.
지역 교회는 새로 정착한 가정에게 언어와 생활 정보를 함께 나누는 자리가 되기도 한다. 예배 외에도 소그룹과 성경 공부가 이런 역할을 한다. 참여 방법은 교회마다 다르므로 문의가 필요하다.
감사와 회개의 태도는 관계를 회복시킨다. 서로를 판단하기보다 세워 주는 말이 공동체를 건강하게 만든다. 말의 온도가 곧 공동체의 분위기다.
다음 세대를 세우는 일은 오랜 시간이 걸린다. 눈에 보이는 결과보다 꾸준한 동행이 중요하다. 작은 약속을 지키는 신실함이 신뢰를 만든다.
기도는 상황을 바꾸기도 하지만 사람의 시선을 먼저 바꾼다. 같은 형편에서도 무엇을 보는지가 달라진다. 그 변화가 다시 행동을 바꾼다.
말씀을 읽는 습관은 하루의 중심을 만든다. 분량보다 꾸준함이 중요하고, 이해가 더딜 때는 함께 나누는 것이 도움이 된다. 질문을 숨기지 않는 공동체가 깊어간다.
섬김은 눈에 띄지 않는 자리에서 완성된다. 준비하고 정리하고 기다리는 일이 예배를 가능하게 한다. 그 수고를 알아주는 문화가 공동체를 오래 지탱한다.
이웃을 향한 관심은 신앙의 자연스러운 결실이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먼저 알아채는 일은 훈련이 필요하다. 작은 관심이 관계를 회복시키는 시작이 된다.
어려움을 겪는 이웃에게 필요한 것은 판단이 아니라 곁에 있어 주는 시간이다. 함께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짐이 가벼워진다. 그 시간이 회복의 자리를 만든다.
감사는 상황이 아니라 시선의 문제다. 작은 것에 감사하는 연습이 마음의 여유를 만든다. 그 여유가 주변을 돌볼 힘이 된다.
기사를 읽을 때는 언제 누가 확인한 내용인지를 함께 살피는 습관이 도움이 된다. 같은 사실이라도 확인한 시점과 경로에 따라 의미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서두르지 않고 원문을 한 번 더 확인하는 태도가 오해를 줄인다.
정보가 많아질수록 무엇을 먼저 볼지 정하는 일이 중요해진다. 제목만 보고 판단하기보다 본문의 근거와 출처를 함께 보는 편이 안전하다. 특히 이해관계가 얽힌 사안은 여러 출처를 나란히 놓고 비교하는 것이 좋다.
커뮤니티 매체의 역할은 소식을 전하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배경과 맥락을 함께 설명해 서로 다른 처지의 독자가 같은 사안을 이해하도록 돕는 일도 중요하다. 그 과정에서 독자의 제보와 질문은 기사 품질을 높이는 실제적인 힘이 된다.
날짜와 대상이 분명하지 않은 이야기는 사실 확인 없이 널리 옮기지 않는 것이 원칙이다. 확인되지 않은 내용은 확인되지 않았다고 밝히는 것만으로도 오해를 크게 줄일 수 있다. 정정이 필요할 때는 신속하게 바로잡는 것이 신뢰를 지키는 길이다.
생활과 밀접한 절차와 제도는 해마다 조금씩 달라진다. 지난해에 통했던 방식이 올해에도 그대로라고 가정하지 않는 편이 좋다. 담당 기관의 공식 안내를 기준으로 삼고, 필요하면 전문가 상담을 병행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지역 사회의 행사와 모임은 소식의 원천이면서 동시에 확인의 장이 된다. 참석자들이 직접 보고 들은 내용은 기사로 정리될 때 더 구체적인 맥락을 얻는다. 다만 개인의 사생활과 관련된 내용은 공개 범위를 신중히 살펴야 한다.
서로 다른 배경을 가진 이웃이 함께 살아가려면 설명과 번역이 꾸준히 필요하다. 언어와 제도가 다르면 같은 일에도 더 많은 안내가 요구된다. 그 과정에서 서로의 사정을 이해하는 폭이 조금씩 넓어진다.
뉴스는 하루의 사건을 전하지만, 그 의미는 시간이 지나며 분명해지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기록을 남기는 일이 중요하다. 지금은 지나치는 장면이 나중에는 판단의 기준이 되는 자료가 된다.
지역 사회가 건강하려면 정보가 한쪽에만 머물지 않아야 한다. 새로 온 사람과 오래 살아온 사람이 서로의 경험을 나눌 때 정보의 질이 함께 올라간다. 작은 안내 하나가 누군가에게는 큰 도움이 된다.
성경은 그것과 싸우라고 말씀하고 있다. 동성애의 유혹과 욕망 또한 그리스도인들이 싸워야 할 죄 중에 한 가지이다.